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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류의 회오리를 일으킨 칭기즈 칸

2015-01-22 04:00 | 추천 0 | 조회 10

칭기즈 칸의 몽골민족은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무기의 성능 면에서 유럽에 비해 훨씬 뒤졌으며, 군대의 숫자도 거의 10만 명 정도로 유럽의 군사력에 비해 아주 열세에 있었다. 특히 칭기즈칸은 자기 이름도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을 뿐 아니라, 제갈공명처럼 지략이 뛰어났다는 설도 없고, 기골이 장대했다는 주장도 없으며, 무예에 능했다는 얘기도 없다. 영웅이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기준의 조건은 거의 갖추지 못한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늘 본인의 한계를 깨닫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했으며, 그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 조언을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무섭게 추진을 했다. 그에게 장점이라면 경청능력과 실행능력이다. 그리고 부단한 자기 혁신 노력이다. 종교적 차이뿐 아니라 그는 출신성분이나 계급 등에 의한 차별을 금지했으며, 혈연, 지연에 의한 공동체를 능력과 성과에 의한 사회조직으로 재편했다. 그는 다른 정복자와는 달리 그가 정복한 민족에 대해서도 고유의 종교 뿐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이어 갈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정책적 배려는 그에게 정복당한 민족이 아무런 불편없이 종전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배려를 통해 그는 그 광활한 땅을 지배할 수 있었다. 곧 다문화적이고 화합적 흡수였던 것이다. 칸의 즉위식은 제왕의 백성에 대한 일방적 충성강요식이 아니라 제왕과 백성간에 구체적인 권력의 교환이었다. 칭기즈 칸은 다소 특이한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했는데 이 점이 다문화적인 포용력과 흡수력, 열린마음자세였다. 칭기즈 칸에겐 노예출신이거나, 원수로 지내는 부족 출신의 인물일지라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와 아무런 친분이 없는 사람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그를 등용했다. 칭기즈 칸의 어린 시절 테무친 때부터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평화적으로, 몽골족과 비몽골족의 부족연합을 이뤄나갔다. 마침내 테무친은 이전에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지역 내 모든 부족의 통합에 성공했다. 그는 출신을 가리지 않고 모두 몽골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가족임을 강조했다. 부족의 힘을 한데 모아 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칭기즈 칸과 그 후예들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동안, 동서양의 자유로운 문물교류가 행해지게 되었다. 몽골인들은 서로 다른 지역 간의 교류를 활성화했다. 그들은 이슬람의 자수가 놓인 실크와 금사 의류를 좋아했다. 그래서 이슬람 방직공들을 중국으로 데려와 실크와 금사 옷을 만들게 했다. 또한 중국의 도자기를 다른 지역으로 유통시키기도 했다. 몽골제국 이전의 문명국들은 서로 왕래가 없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이 사망할 즈음엔 세상은 하나의 공동체로 변해있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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