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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국제결혼 역사

2013-07-18 04:00 | 추천 0 | 조회 57

우리나라의 국제결혼은 상하층 모두 골고루 이루어졌다. 특히 상층에서의 국제결혼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바꾸는 일대사 파격적인 일이라 상징적인 역사로 남아있다. 물론 다문화형성에 큰 일조를 했고, 이로 인한 다문화의 흐름은 더욱더 크게 움직여왔다. 먼저 지난 첫 시간에 말씀드린 단군의 국제결혼은 우리역사의 첫 단추를 여는 상징적인 신화인 만큼 단군의 국제결혼은 우리역사가 다문화로 시작되었다는 것에 전체를 가늠하게 해주는 일대사 사건이다. 신화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고구려의 고주몽은 하늘에서 빛이 쫒아 다니더니 잉태된 경우인데, 이 하늘이라는 것이 천손의 자식으로서 퉁구스계의 부여족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퉁구스족은 시베리아족과 만주족의 혼혈을 뜻한다. 또한 박혁거세는 흰 말이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에서 강림한 천신이 우물에 내리고 알에서 태어난다. 난생은 남방계에서 온 것을 암시하고 있다. ① 어쨌든 고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두 왕비를 두었는데 둘째 왕비가 중국여인과의 국제결혼이었다. 첫째 정실부인의 시기질투에 못이겨 다시 중국으로 가버리자 유리왕이 중국출신 왕비를 못잊어 슬픔을 달래면서 황조가를 지은 것은 우리국문학사에도 유명하게 남아있다. ② 또한 김수로왕과 인도공주 허황옥과의 국제결혼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수로왕도 이주민설이 강력하다. 김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이며 김해김씨. 김해허씨의 시조이다. 김수로왕신화에서도 난생이다. 여섯 개 알에서 각각 태어난 아이들은 각각 여섯 가야의 수장이 되고 첫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김수로였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남방계출신이라는 것이며, 다른 부족국가를 정복하여 금관가야를 세우고 왕이 된다. 실제로 근대에 허황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김해 예안리 고분 등의 왕족유골 4구 중 1구를 DNA분석한 결과를 보니까 백인종의 특징이 나타났다. 이는 가야의 정착한 선주민 중 일부가 이미 인도계가 들어와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결국 가야에는 북방계와 남방계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또 당시 사용하던 언어가 남인도에서 사용하던 언어라 김수로 자체가 인도에서 온 사람일 수 있다는 학설도 있다. ③ 고려 공민왕의 왕비는 보탑실리공주라고 하는 노국공주이다. 원나라의 황족 위왕의 딸로서 결혼식도 1349년 원나라에서 했다. 노국공주 인덕황후는 정책적인 결혼이었으나 공민왕이 너무나 사랑했고 급기야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젊은 나이에 죽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아예 정사까지 뒤로하고 슬퍼했다. 더 심하게는 공주의 초상화를 모신 대궐을 짓고 3년간 육식도 하지 않은채 슬퍼하기만 했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단초를 마련할 정도로 사랑했다. 노국공주의 능이 바로 정릉이다. ④ 또 대한제국의 황태자비 이방자여사는 일본 황손출신이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은 1907년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간다. 유학이라는 명목이었으나 당시 7살이었다.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결혼한다는 소식을 외부로부터 들으면서 이 둘은 정략결혼을 했다. 일제가 일본인과 조선인의 동화를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희생양이 이방자여사가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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