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일입니다. 파리에는 한국에서 온 많은 작가들이 활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한 작가를 만났었는데 아무래도 어렵고 궁핍한 유학생활로 힘들어보였지만 그림을 열심히 잘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작가가 아르바이트로 운전을 했었는데 하루 시간을 내서 저와 함께 파리에서 1시간정도 떨어진 오베르쉬르우아즈라는 곳을 갔습니다. 그곳은 잘 아시다시피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가 묻혀 있는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물론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권총사고로 고흐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오베르쉬르우아즈에 가면 고흐가 그렸던 집들, 카페, 밀밭위를 나는 까마귀라는 유명한 고흐의 마지막 작품이 있는 장소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때가 11월의 음산하고 칙칙한 가을 날씨였는 데 아주 황량하고 쓸쓸한 날이었습니다. 그때 이 작가와 함께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고흐의 무덤을 거닐다 파리에 돌아온 기억이 있습니다. 이영춘 작가는 지금은 작품활동을 하지 않고 저도 연락이 끊어져서 만난 지 오래되었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가가 그렸던 90년대 초의 이 그림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이 그림은 오후 3시 반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단색조로 알록달록하지 않고 몇 가지 색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미술용어로는 모노크롬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단일한 톤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흔히 말합니다. 갈색, 검정색, 흰색, 그리고 약간의 노랑계통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그림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손에 깍지를 끼고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 같고 얼굴은 눈코입이 거의 지워져버리고 암시적으로만 슬쩍 나타났습니다. 눈이 하나 없고 입이나 코도 불분명하고 눈썹도 없습니다. 검은색 옷을 입고 흰색 테이블에 앉아서 손을 꼼지락하고 있습니다. 벽에는 시계가 걸려있고 시계는 지금 3시 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밑에 추가 움직이는 것처럼 처리가 되어 있습니다. 단일한 하나의 추를 그린 것이 아니라 몇 개를 덧붙여 칠해서 추가 마치 오른쪽과 왼쪽을 오고가며 흔들리는 모습을 매력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추가 흔들리면서 마치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다는 느낌이 얼핏 들게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자세히 보면 뒤통수도 뒤가 번져있듯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시계추가 테이블에 앉아있는 남자의 머리를 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테이블에는 얼기설기 엮여져있는 형체가 드리워져있는데 얼핏 보면 사람의 두상 같기도 하고 뇌 같다는 느낌도 주고 있습니다. 3시 반이라는 시간은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 약간 졸음이 몰려오기도 하고 권태로운 시간이기도 하고 하루의 일과의 끝 무렵에 피곤이 느껴지는 시간일 것 같습니다. 이 작가는 아마 작업실에 앉아서 작업을 구상하면서 잘 풀리지 않는 생각 그리고 무료하고 게으른 한때의 느낌을 이렇게 그린 것 같습니다. 제목이 오후3시반입니다. 시계는 정확히 3시 반을 가르치고 추는 움직이고 있고 남자는 앉아있고 머리는 비어져있는 것 같고 머릿속에 든 뇌나 잡다한 생각들은 테이블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그림들은 굉장히 주관적으로 자신의 하루의 일과 중에 어느 한순간을 기억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은 이처럼 자신의 삶에서 유일한 것들을 그리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푸석한 질감과 단일한 몇 가지 색조들이 엄숙하게 오후의 나른하고 가라앉는 한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그 형태도 상당히 재밌고 회화적이고 기존에 봤던 그림들과는 다르게 딱딱하고 치밀하게 묘사된 것이 아니라 대충 그려진 것 같으면서도 아주 유니크한 멋이 감도는 그런 그림입니다. 색깔들과 물감들의 배합도 재밌습니다. 이런 그림들은 보는 순간 우리한테 나에게 오후 3시 반은 어떤 시간일까? 그 오후의 나른한 시간들을 사람들은 각자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될일과 치러야 될 많은 것들 속에서 사람들은 잠시 방황할 것입니다. 이영춘 작가의 이 그림은 오후 3시반 이라는 아주 한가하면서도 무료하고 게을러지고 권태로운 한순간에 작가의 심정을 기록한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