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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상도를 만든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

2014-08-08 04:00 | 추천 0 | 조회 9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1685-1744), 그가 쓴 석문심학이라는 책이 바로 교토 상인의 상도, 더 나아가 오늘날 경제대국 일본 상인의 상도를 만들었다. 이시다 바이간은 쿄토 근처에 있는 구와다(桑田)군의 도게촌(東懸:지금의 교토부 가메오카시)이라는 소도시에서 농부인 이시다곤에몬(石田權右偉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오늘날 가메오카시는 교토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전원도시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는 그가 겨우 8세 때 교토의 작은 포목점에 견습사환으로 갔다. 불행하게도 그가 포목점에 온지 얼마 안되어 그만 가게가 망하고 말았다. 점포가 망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부친으로부터 뜻밖의 전갈이 왔다. ‘주인을 한 번 모시면 어버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 주인의 부끄러운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부친의 말에 따라 그는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때부터 심부름을 하면서 가게주인을 부모님처럼 모시며 살았다. 이시다 바이간의 아버지는 비록 가난했으나 성실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어린 이시다 바이간이 산에 갔다가 밤을 주워왔다. 아버지는 자식 이시다 바이간이 주워온 밤을 보고 그 밤이 산 경계의 어느 쪽에 떨어져 있느냐고 물었다. 오른쪽에 떨어져 있다고 하자 그는 한밤중에 그 밤을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산으로 보냈다. 이러한 성품을 가진 그의 아버지였기에 그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다시 가게에 남아 주인을 봉양했다. 8살 때부터 13살 때 까지 5년간 가게주인을 봉양했지만 고생이 막심했다. 어린 나이의 그가 너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해 그를 다시 고향집에 데려주었다. 고향에서는 잠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가 다시 교토로 나온 것은 그의 나이 23세때이다. 이번에는 구로 야나기(黑柳)라는 일류 포목점에 취직했다. 과거의 경력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견습점원이었다. 당시 23세면 지금의 40세 정도의 나이이다. 당시엔 수명이 짧았으므로 40세만 되어도 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23세에 견습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보통 12-3세에 견습을 시작할 때였다. 23세때에 다시 뒤늦게 견습을 시작했으나 열심히 일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물건들이 거리에서 잘 보이도록 가지런히 놓았고, 밤에는 잠이 들기 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루 종일 가게 일을 하느라고 고단했지만 밤에도 쉬지 않았던 것이다. 유학, 불교, 신도 등에 대해 나름대로 책을 통해서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 나갔다. 그로부터 견습생활은 무려 1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40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반토(番頭), 즉 지배인이 되었다. 반토생활을 하면서 그는 더욱 더 깊은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산으로 들로 스승을 찾아 다녔다. 그때 만난 사람이 은자(隱者) 오구리 료운(小栗了雲)이다. 오구리 료운을 만난 후 이시다 바이간은 그의 제자가 되었고 가게일을 그만 두었다. 오구리 료운으로부터 배운 것은 도(道)와 심(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참선과 수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욱 깊게 다져 나갔다. 반투생활은 2년 남짓으로 길지 않았다. 점원생활 20여년은 그에게 장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실천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42세쯤 되었을 때 은퇴했다. 당시에는 45세가 되면 은퇴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보다는 조금 빨랐다고 할까. 반투에서 은퇴한 후 그는 교토의 구루마야정(車屋町)에 있는 그의 집에 심학(心學)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었다. 학교를 열었지만 수강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를 연 첫 날, 그는 자신의 집 앞에 서서 행인들을 상대로 공개강의를 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귀담아 들어주었던 사람은 손에 무를 든 농부 한사람이었다. 그때부터 15년간 그는 제자를 가르치고 여행을 다니면서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리고 그 시기에 그 유명한 석문심학을 저술하게 된다. 상인정신을 체계화한 석문심학(石門心學) 석문심학(石門心學)은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1685-1744)이 쓴 사상서로 <도비문답>과 <제가론(齊家論>을 합친 내용을 말한다. <석문심학>에서 석문은 그의 아호이다. <석문심학>은 오늘날 일본상인의 바이블이자, 일본인의 상도를 최초로 체계화시킨 책이다. 오늘날 일본이 상인국가로 탄생하게된 바탕이 거기서 비롯되었다. 1700년대 일본은 쌀을 경제단위로 하는 사회에서 화폐가 경제단위로 바뀌는 와중에 있었다. 모든 쌀은 오사카로 와서 화폐로 교환되었는데 이시다 바이간은 그러한 시대를 맞아서 상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깨달았다. 이시다는 상인은 왜 존재하는가, 이익은 어떻게 남기는 것이 좋은가 등등의 내용을 석문심학에 썼다. 심학이라는 말의 뜻은 <마음으로 반성해 몸으로 실천한다>는 뜻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1. 노동은 정신수양이며 자기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즉 노동은 힘들고 고단한 것이 아니라 인격수양의 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빈둥거리고 노는 것보다는 공짜로라도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정신수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 6시간 일해서 한달에 쌀 석섬을 얻는다.우리는 하루 8시간 일해서 살 석섬 1되를 얻는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시다 바이간의 생각이었다. 석섬이나 석섬 한되란 사실 큰 차이가 없고, 하루에 무려 두시간이나 더 일을 해서 한달에 겨우 한되의 생산을 더 늘린 것이지만, 그래도 이시다 바이간은 그걸 소중하게 보면서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여겼다. 오늘날 일본인들의 DNA속에는 이시다 바이간의 영향을 받아 노동은 고통스런 것이 아니라 매우 좋은 일이며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일하므로 자신의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2. 진정한 상인은 상대방과 자기가 모두 잘 되게 하는 것이다. 즉, 물건을 팔 때 ‘소비자인 상대방도 납득하고 상인인 자신도 납득하는 것’이다. 그 당시의 상인들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것이 결국 상대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시다는 상대와 자신이 모두 잘 되는 것이 진정한 상도라고 설파해서 그간의 상인관을 뒤짚었다. 좋은 물건을 작은 이문만 붙이고 팔아서 소비자가 만족하고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상도였다. 상인은 물건을 팔 때 한푼이라도 더 이익을 남기려하는데, 필요 이상의 이문을 남기면 오래가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 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윤을 남기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이익을 남기되 이윤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하는데서 상행위 목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며, 소비자를 이익확대의 수단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인은 작은 부를 꾸준히 쌓으면서 만족해야지, 일확천금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 석문심학에 담겨있다. 즉 1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자기의 치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정직하고 사리사욕이 없도록 하여 천하의 낭비를 줄이자는 것이다. 3. 감사하는 마음에서 출발해 80% 벌이에 만족해야 한다. 장사는 키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장사의 질이 어떤지가 문제라는 뜻이다. 무조건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객의 만족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가게는 머지않아 망한다는 것이다. 매출의 증대 이전에 더욱 철저한 품질관리와 고객관리(애프터 서비스)를 철저히 해서 매출이 목표의 80% 밖에 안 되더라고 가게를 믿어주는 고객을 만들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사람들이 그 가게를 믿고 평생 찾아온다는 것이다. 4. 마음이 허하고 정신수양이 안된 자들이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소비에 열중한다. '사치는 적이다.' 이시다 바이간은 사치를 극도로 경계했다. 당시의 일본 사회는 사치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상업의 발달로 부가 쌓이면서 벼락부자가 출현했다. 돈은 많은데 마땅한 투자처는 없었다. 저축에 비해 투자할 곳이 없으니 자금이 남아돌았던 것이다. 남은 돈을 쓰기 위해 귀족들은 기모노 패션대회를 여는가하면 이미 그때 외식산업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또 가부키나 분라쿠(文樂)와 같은 공연예술이 전성기를 맞았고, 공예가, 다도, 꽃꽂이 등이 극성기를 이루었다. 겐로쿠(元錄.1688-1703))시대의 일본의 모습이다. 이 시기에 이시다 바이간은 구로야나기(黑柳) 포목점의 견습사원이었다. 그는 견습사원으로 있으면서 당시 일본인의 사치를 두눈으로 직접 목도했다. 그 당시의 사치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사례가 있다. 에도의 목재상인 기노쿠니야분자에몬(紀國屋文左衛門)은 에도의 한동네를 몽땅 사서 거기에 거주하였다. 그는 손님이 한 번 앉았다 일어난 다다미는 모두 교체했는데 그 때문에 돗자리를 새로 까는 기술자가 항상 7명씩이나 대기해야만 할 정도로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결국 일본은 재화가 비생산적인 분야로 과다하게 소비되므로 그 얼마 후에는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1707년에는 후지산의 분화구가 대폭발, 연기와 분진이 도쿄까지 날아 왔고, 햇빛을 받지 못한 농작물은 자라지 못해 일본경제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겐로쿠 시대의 17년은 이렇게 사라졌다. 이시다 바이간은 한때의 사치가 결국 훗날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5.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를 추구해야 신뢰를 얻는다. 이시다 바이간은 상인은 반드시 인의예지신을 갖추라고 설파한다. 인(仁)은 타인 즉 고객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며 의(義)는 사람으로서 바른 마음, 예(禮)는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 지(智)는 지혜를 상품으로 만드는 마음 신(信)은 돈을 빌리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라 는 내용이다. 그는 마치 군자에게나 가르칠 법한 내용을 상인들이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물욕을 버려서 눈앞의 이익보다는 상대를 이롭게 하는 것이 오랜동안 장사를 할 수 있는 길이며 모든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좋은 물건을 이익을 조금 남겨서 파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뜻인 것이다. 이시다 바이간이 추구했던 것은 상인의 존재의미와 이윤의 정당성, 검약과 정직이었다. 말하자면 상도인 것이다.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은 당시에도 이미 많은 젊은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제자들은 각지에서 심학의 강습소를 열었다. 교토의 슈세이사(修正舍), 지슈사(時習舍), 메이린샤(明倫舍) 등이 세워졌고 오사카에도 메이시샤(明試舍), 세이안사(靜安舍), 이코샤(?衝舍), 에도에는 산젠샤(參前舍) 등이 문을 열었다. 이시다 바이간은 60세로 사망하기 까지 15년간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교토와 오사카 등지를 돌면서 강연회를 열었고 <도비문답>(都鄙問答)과 <재가론(齊家論>을 저술했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일본국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쓴 심학과 도비문답은 당시 일본의 상공업자를 위한 저술서였지만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일본 경영의 고전이다. 그 책은 저술한 이래 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대를 뛰어넘어 일본의 유수한 대기업경영자들에게 지침이 되고 있다. 예컨대 오사카 출신으로 일본 굴지의 기업을 일으킨 내셔날, 파나소닉 그룹의 창업주 마쓰시다 고노스케(松下幸之助)의 경영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살아생전에 자신의 경영 철학의 80%는 이시다 바이간으로 부터 배운 것임을 고백한 바 있다. 또 근면, 절약, 정성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국민성도 바로 그로부터 출발해서 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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