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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 사회가 구성원을 행복하게 한다

2013-03-15 04:00 | 추천 0 | 조회 12

우리는 흔히 행복하면 감성을 이야기합니다. '감성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라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 데 저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성이 아닌 이성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할 것이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오래된 근거에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태를 말합니다. 완전태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도토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은 참나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은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내가 종교적인 일, 사업, 공부를 하던지간에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한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의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 이성적인 정신활동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복은 감성보다는 이성에서 찾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현대사회는 굉장히 감성적인 사회입니다.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사실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알아보고 현상보다는 본질을 꿰뚷으려고 노력하는 것들이 부족합니다. 한 국가, 한 사회는 세 가지 큰 기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경제, 정치, 문화입니다. 경제, 정치, 문화는 각각 추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각각 추구하는 것이 다른 요소들을 가지고 서로 견제를 하고 동시에 보완을 하면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나갑니다. 경제는 이익실현, 정치는 정의실현, 문화는 의미실현, 가치실현을 추구합니다. 21세기는 정치나 문화가 각각이 추구해야 하는 것들을 포기하거나 가장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내용으로는 이익실현을 추구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심지어 요즘 정치지도자들은 '국가의 CEO다.'하고 자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의실현, 정의실현이란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최소한의 삶을 최소한의 인권이 보장되는 공정성이 보장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들을 갖추는 것이 정치의 가장 큰 역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가 이익실현쪽으로 많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문화도 마찬가지로 지방자치단체에서 축제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축제 내용을 알고보면 바깥 형식은 문화지만 실제 내용은 경제적 활동, 장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언론매체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문화들은 대부분 그 뒤에 스폰서들이 있고 광고가 있습니다. 광고, 스폰서와 연결되어 있는 문화활동은 스폰서의 의도에 반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결국 정치나 문화가 바깥 모양새로는 정의실현, 의미실현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내용은 경제활동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치나 문화활동을 바깥현상으로 볼 것만 아니라 그 안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회를 정확히 읽을 수가 없습니다. 공자님은 학문, 배움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를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때문에 행하지를 못한다고 생각했기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사회에서도 알지 못해서 행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저는 대학에서 학생들한테 윤리경영과목도 가르치고 있지만 어떤 조직에서 윤리경영을 하는 데 있어서 몰라서 윤리경영을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알면서도 하지를 않습니다. 왜 이러한 현상들이 사회적으로 팽배해지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하나의 재치, 순간적인 말재주 같은 것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사회로 가고 있기때문입니다. 여기에 특히 앞장서고 있는 것이 바로 언론매체들, 두번째는 정치인입니다. 우리가 TV에서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이 말재주 경연장입니다. 그래서 말재주에는 본질적인 깊이 있는 내용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자극적, 순간적인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에 정치인들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들어보면 궤변인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이성적인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려면 재치나 순간적인 말재주를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욕심이 과하고 한없이 게으르고 싶은 게으름도 같이 존재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인간들의 지나친 욕심, 무한도의 욕망같은 부분을 제한해야 된다는 주장들만 난무하고 개인의 게으름에 대해서도 어떤 경고를 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인기를 얻지 못합니다. 1979년에 영국에서 대체정부가 영국병이 대단히 문제라고 주장하고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복지위에서 잠자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실업이 하나의 직업이 되는, 정부가 보호해주는 것에만 의존하고 자기 스스로 독립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영국사회에서 굉장히 늘어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20대 젊은 친구들이 직장을 구하면서 그런 표현을 많이 합니다. '뽑아만 준다면 제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제 잠재능력을 평가해주십시오' 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런부분을 많이 강조합니다. 너는 잠재능력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왜 지금까지 발휘하지 않고 일단 뽑아주면 그때부터 발휘하겠다고 하는 것이냐 왜 지금까지 발휘를 안 했느냐 좋은 잠재능력을 최근에 보면 정부에서 20대들 스팩에 대해서 굉장히 염려를 하면서 직장을 지원하면서 자기가 졸업한 학교를 기제를 안하고 또 어떤 것을 기제를 안하고등 어떤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는 데 저는 그 내용을 보면서 결국 스팩이라는 것이 과거에 그 사람이 얼마나 노력을 해왔는지,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뭘 해왔는지 이런 부분들을 정리한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연현상에 상관없이 지금까지 해왔던 관행대로, 관성대로 앞으로 갈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우리가 스팩중에서 현실적으로 유용하지도 않으면서 모양새를 맞추기위한 스팩은 경계를 해야겠지만 개인의 노력치를 나타내는 객관적인 지표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개인의 지나친 게으름,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개인의 무한도 욕망을 제약하는 것처럼 사회는 같이 제약을 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역량을 미치는 리더들 역시 제가 말씀드린 이성적인 부분들 결국 이성은 연역적인 것, 귀납적인 것입니다. 연역적은 논리를 말합니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야 한다는 겁니다. 귀납적인 것은 현실적 근거입니다. 현실적으로 실제로 그랬는지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사고와 판단, 접근을 강조할때 사회전체적으로 자기 생각과 자기 철학을 가지고 사회현상들을 바라볼수 있는 자기가 중심이 될수 있는 그러한 사회가 되고 또 그러한 사회가 구성원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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